정보는 넘치는데 왜 우리는 자꾸 잊는 걸까? 기억의 저장고가 넘쳐나는 시대, 왜 우리는 텅 빈 것처럼 느낄까?
넘쳐나는 정보 속에서, 기억은 어디로 갔을까.
오늘날 우리는 과거 어느 시대보다도 많은 정보를 접하고 있다. 스마트폰만 켜면 뉴스, 영상, SNS, 메신저, 광고, 이메일 등 수많은 정보가 한꺼번에 밀려온다. 누군가의 생각, 감정, 기록, 통계, 사건, 해석이 실시간으로 흘러간다. 정보의 바다에 빠져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점점 더 ‘기억하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 어제 본 뉴스의 제목조차 기억나지 않고, 방금 읽은 글의 요지가 희미해진다. 친구의 말도, 책 속 문장도, 심지어 나 자신이 느낀 감정조차 금세 희미해진다.
정보는 넘치는데 왜 우리는 자꾸 잊는 걸까? 이 질문은 단순히 기억력의 문제가 아니다. 현대인의 사고방식과 삶의 구조 전반을 되짚어보게 만드는 질문이다. 이는 뇌과학, 심리학, 철학이 함께 고민해야 할 주제이며,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세상을 ‘경험’하고 있는지를 되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1. 뇌는 정보를 걸러내는 필터다
사람의 뇌는 모든 정보를 다 기억하도록 설계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뇌의 핵심 기능 중 하나는 ‘잊는 것’이다. 무의미하거나 반복되는 정보, 감정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경험은 자동으로 걸러지고 사라진다. 기억은 저장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는 것이다. 우리가 중요한 정보만 기억할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문제는 현대 사회가 이 필터 기능을 압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루에 접하는 정보량이 많아질수록 뇌는 더욱 강력하게 필터링을 작동시킨다. 이는 생존을 위한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예를 들어, SNS를 스크롤하면서 100개의 정보를 접하면 그중 95개는 곧장 잊히고, 5개만 남는다. 그런데 이 5개마저 ‘깊이 있는 기억’이 되기는 어렵다. 정보의 흐름이 너무 빠르기 때문에, 우리가 멈춰서 생각하거나 감정적으로 연결될 틈이 없기 때문이다. 기억은 단순한 저장이 아니라, 경험과 감정, 의미의 축적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럴 여유를 갖지 못한 채, ‘정보 소비자’로 살아가고 있다. 이 소비적인 태도가야말로 기억을 흘려보내는 핵심 요인이다.
2. 기억은 입력이 아니라 연결이다
우리는 종종 ‘많이 보면 많이 기억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기억은 단순한 입력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정보 간의 연결과 구조화, 그리고 그것이 나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 스스로 찾아내는 과정에서 기억은 만들어진다. 정보가 ‘기억’으로 남기 위해선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하나는 반복적인 접촉이고, 다른 하나는 정서적 혹은 인지적 연결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떤 노래를 오랫동안 기억하는 이유는 단지 멜로디가 인상적이어서만은 아니다. 그 노래를 들었을 때의 감정, 상황, 사람과의 관계가 함께 저장되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수능 공부를 하며 외웠던 수많은 지식은 시험이 끝나자마자 대부분 사라진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 정보가 내 삶과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너무 많은 정보를 너무 빠르게, 너무 얕게 소비하고 있다. 마치 얕은 바다를 발끝으로만 스치듯 스크롤하며 지나간다. 연결되지 않은 정보는 머무르지 못한다. 정보가 기억이 되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하고 맥락이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의 정보 환경은 그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3. 기억하지 않는 시대, 우리는 무엇을 잃고 있는가
기억하지 않는다는 것은 단순히 ‘깜빡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나의 삶이 나에게 의미 있는 이야기로 구성되지 못하고 있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우리는 기억을 통해 자신을 이해하고, 과거를 정리하며, 미래를 계획한다. 기억은 곧 정체성이다. 기억이 없으면 우리는 뿌리를 잃은 존재가 된다. 마치 검색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삶, 클라우드에 모든 걸 저장해두고는 정작 나 자신은 텅 빈 느낌이 드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기억하지 않는 시대는 동시에 책임지지 않는 시대이기도 하다. 누군가의 말에 쉽게 상처받고, 또 쉽게 잊는다. 자신이 한 말이나 행동의 무게를 돌아보지 않는다. 기억이 사라지면 맥락도 사라지고, 맥락이 사라지면 이해와 공감도 함께 사라진다. 우리는 모두 연결된 세계에 살고 있지만, 서로의 이야기를 기억하지 못하는 낯선 타인으로 머물러 있다.
기억의 부재는 감정의 얕음으로 이어지고, 감정의 얕음은 관계의 파편화를 만든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인간은 더욱 연결되어야 하지만, 기억하지 못하는 인간은 점점 더 고립된다. 진짜 연결은 기술이 아닌, 기억이라는 다리 위에서 가능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기억을 되찾을 수 있을까? 가장 중요한 시작은, 정보를 소비하는 태도에서 ‘의미를 찾는 태도’로 전환하는 것이다. 단지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내 삶에 연결시켜 기억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정보를 접할 때 “이건 왜 중요하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것과 내가 전에 봤던 건 어떤 관계가 있을까?” 같은 질문을 던지는 습관이 필요하다. 또한 일상의 리듬을 바꾸는 것도 중요하다. 무작정 많은 콘텐츠를 소비하기보다는, 책 한 권을 천천히 읽고 곱씹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스마트폰을 손에서 잠시 내려놓고, 종이에 글을 써보거나 대화를 통해 기억을 나누는 것도 좋다. 사진을 찍는 대신 눈으로 순간을 온전히 바라보는 연습, 누군가의 말을 다시 떠올리며 의미를 되새기는 노력도 기억을 활성화하는 방법이다. 무엇보다, 우리는 기억을 단지 뇌에 저장하는 정보로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기억은 살아 있는 감정이고, 나의 삶을 구성하는 이야기의 재료다. 그 기억들을 스스로 곱씹고 엮어갈 때, 우리는 다시 ‘경험하는 존재’로 살아갈 수 있다.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에, 우리는 정작 자신이 누구였는지, 무엇을 원했고, 무엇을 사랑했는지를 잊어간다. 모든 것을 외주화할 수 있는 시대지만, 기억만큼은 그럴 수 없다. 기억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고유한 능력이자, 삶의 방향을 잡아주는 나침반이다. 우리는 다시 기억해야 한다. 누군가의 말, 스쳐 지나간 순간, 마음속에 스며든 문장 하나, 오래된 풍경 속의 감정까지. 그것들을 다시 떠올리고 내 삶에 의미 있게 연결시키는 것. 그것이 디지털 시대의 진짜 지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