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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는 기억을 잊지 않는다, 다만 꺼내지 못할 뿐이다

by winnie2725 2025. 4. 16.

뇌는 기억을 잊지 않는다, 다만 꺼내지 못할 뿐이다. ‘기억상실’은 정말로 잊는 것일까?
누구나 한 번쯤, 이름이 생각나지 않거나 어떤 단어가 혀끝까지 맴돌다가 사라져버리는 경험을 한다. 어떤 경우에는 중요한 약속이나 일을 깜빡하기도 하고, 때로는 오래전 누군가의 얼굴이나 장소를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도무지 기억나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흔히 ‘잊어버렸다’고 말한다. 하지만 뇌는 과연 정말로 어떤 정보를 ‘잊는’ 것일까?

 

뇌는 기억을 잊지 않는다, 다만 꺼내지 못할 뿐이다
뇌는 기억을 잊지 않는다, 다만 꺼내지 못할 뿐이다

 

 

뇌과학자들은 인간의 기억 시스템을 하드디스크에 비유하곤 한다. 쓰고, 저장하고, 삭제하는 것이 모두 가능한 구조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조금 다르다. 우리의 뇌는 정보를 명확히 ‘삭제’하는 방식으로 기억을 잃지 않는다. 오히려 더 정확한 표현은 ‘접근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마치 서랍 속에 넣어둔 물건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어디에 뒀는지 몰라 꺼내지 못하는 것과 같다. 기억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지만, 우리는 그 위치를 잃어버린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겪는 많은 ‘망각’은 진짜 소멸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검색 실패’에 불과하다. 뇌는 정보를 저장할 뿐 아니라, 그 정보를 필요할 때 꺼내오는 능력까지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꺼내기’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기억은 존재하지만 접근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우리가 기억을 잊는 게 아니라, 기억이 우리를 피해 다니는 것이다.

 

1. 기억의 문은 열리는 순간이 있다


가끔 아주 우연한 계기로, 잊고 있던 기억이 갑자기 되살아나는 순간이 있다. 오랜만에 맡은 어떤 냄새, 길거리에서 들려오는 옛날 노래, 어린 시절과 비슷한 풍경을 마주할 때 뇌 속 어딘가에서 툭 하고 기억이 튀어나온다. 이럴 때 우리는 놀라워하면서도 기쁘다. ‘내가 이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구나’ 하는 감탄과 함께, 잊혀진 줄 알았던 나의 일부가 되살아나는 느낌을 받는다.

이런 현상은 뇌의 작동 방식이 연결망 네트워크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뇌는 기억을 고립된 정보로 저장하지 않고, 감각, 감정, 상황, 맥락 등 다양한 요소와 연결된 상태로 기억한다. 그래서 특정 감각 자극이 과거의 한 장면 전체를 환기시킬 수 있다. 어떤 기억은 ‘논리적 검색’이 아니라 ‘감각적 자극’에 의해 되살아나는 것이다. 때때로 우리가 기억을 되찾기 위해 집중하면 오히려 떠오르지 않고, 무심코 다른 일을 하다가 불쑥 생각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뇌가 능동적으로 정보를 찾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뇌는 ‘노력’보다 ‘연결’을 통해 기억을 불러온다. 그리고 이 연결은 예측할 수 없는 순간에 작동하기 때문에, 우리는 늘 스스로 놀라게 된다. 뇌는 잊지 않는다. 단지 열쇠가 필요할 뿐이다.

 

2. 디지털 기억과 인간 기억의 결정적 차이


현대 사회에서는 대부분의 정보를 디지털 기기에 저장한다. 스마트폰은 일정, 연락처, 사진, 심지어 우리의 위치와 건강 정보까지 기억해준다. 인터넷 검색창은 우리의 외장 기억처럼 작동하며, 굳이 외울 필요 없이 필요한 정보는 언제든지 다시 찾아볼 수 있다. 이처럼 디지털 기억은 빠르고, 정확하고, 무한히 복제 가능하다.

그러나 인간의 기억은 디지털 기억과 다르다. 인간의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서 변형되고, 감정에 따라 왜곡되며, 때때로 잊힌다. 하지만 이 ‘불완전성’이 인간 기억의 본질이다. 우리는 정보를 저장하는 기계가 아니라, 기억을 통해 자신을 이해하고 세계를 해석하는 존재다. 즉, 인간의 기억은 단순한 데이터베이스가 아니라, 해석과 의미가 담긴 이야기다. 디지털 기억은 언제든지 정확한 정보를 꺼낼 수 있지만, 그것은 ‘살아 있는 기억’이 아니다. 사진을 아무리 많이 찍어도, 그날의 온도나 분위기, 마음의 떨림까지 저장할 수는 없다. 인간의 기억은 정보 이상의 것이며, 그것은 나라는 존재의 일부로서 기능한다. 잊어버리는 것조차도 인간다운 과정이며, 그것이 우리를 기계와 구분 짓는다.

 

3. 망각은 실패가 아니라 생존 전략이다


우리는 종종 망각을 나쁜 것으로 여긴다. 기억을 잘하지 못하면 무능력하다고 느끼고, 무언가를 자꾸 잊는 자신을 탓하기도 한다. 그러나 망각은 단지 뇌의 오류가 아니다. 오히려 뇌가 살아가기 위해 의도적으로 선택하는 전략일 수 있다. 만약 모든 것을 다 기억한다면, 우리는 일상생활을 제대로 영위할 수 없다. 사소한 정보가 과잉되어 중요한 정보를 찾는 데 방해가 된다면, 그건 더 큰 문제다.

실제로 기억력이 비정상적으로 뛰어난 사람들, 예컨대 ‘과잉기억 증후군’ 환자들은 일상의 사소한 일들까지 모두 기억하는 대신, 감정적으로 매우 힘들어하고 피로를 느낀다고 한다. 뇌는 불필요한 정보를 ‘지우는’ 방식으로 정리하며, 그것은 우리가 더 나은 판단을 하고 미래를 계획할 수 있도록 돕는다.

또한 트라우마 같은 고통스러운 기억을 억제하거나 차단하는 것도 일종의 생존 전략이다. 이 역시 기억을 완전히 삭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접근하지 않도록 막는 것이다. 망각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 기억하지 않음은 무능이 아니라, 유연함의 다른 이름이다. 우리는 필요한 기억만을 남기고, 나머지는 배경처럼 희미하게 흘려보냄으로써 앞으로 나아간다.

“나는 잊었지만, 뇌는 기억한다.” 이 말은 인간 기억의 미묘함을 가장 잘 설명한다. 우리는 모든 것을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그럼에도 우리 안에는 수많은 경험과 감정이 저장되어 있다. 그것은 때로 말이 되지 않지만, 몸이 기억하고 마음이 느끼는 방식으로 되살아난다. 우리가 기억을 통해 사는 것이 아니라, 기억이 우리를 살게 한다고 말하는 이유다. 기억은 단지 과거를 저장하는 기능이 아니라, 현재를 구성하고 미래를 향한 방향을 만드는 힘이다. 잊혀졌다고 느끼는 많은 것들이 사실은 우리 안 어딘가에 여전히 남아 있으며, 언제든지 다시 살아날 수 있다. 그러니 너무 조급해하지 말자. 기억은 우리를 떠나지 않았다. 다만, 문을 두드릴 열쇠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