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을 꺼내는 일은 점점 기계의 몫이 되어간다. 추억을 떠올리는 방식이 달라졌다.
예전에는 누군가와의 대화를 통해, 혹은 오래된 일기장을 다시 펼쳐보며 기억을 더듬었다. 오래된 사진 한 장을 꺼내 들고, 그 사진 속 사람과 장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자연스럽게 당시의 감정과 분위기가 되살아났다. 추억은 오롯이 인간의 몫이었다. 인간만이 경험을 감정으로 저장하고, 그것을 상황에 따라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이제는 기억을 ‘기계’가 먼저 불러낸다.
스마트폰 속 구글 포토나 애플 포토는 매일 ‘몇 년 전 오늘’을 자동으로 보여준다. AI는 사진 속 사람들의 얼굴을 분류하고, 위치 정보를 분석하여 우리에게 ‘이날 이런 일이 있었어요’라고 말하듯 푸시 알림을 보낸다. 우리가 먼저 떠올리지 않아도, 기계가 먼저 기억을 호출한다. 이제 추억은 더 이상 ‘내가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기계가 보여주는 것’이 되었다. 그저 스마트폰을 켜기만 해도 수년 전의 장면이 눈앞에 펼쳐진다. 우리는 추억을 떠올리는 감정의 문턱에 도달하기 전에, 먼저 화면을 통해 그 기억을 ‘보게’ 된다. 그리고 때때로 이렇게 묻는다. “어, 이 사진 언제 찍었지?” 기억은 여전히 내 안에 있지만, 그것을 꺼내는 열쇠는 점점 기계가 쥐고 있다.
1. 자동화된 기억의 편리함과 그늘
기계가 추억을 대신 꺼내주는 일은 분명 편리하다. 굳이 앨범을 꺼내지 않아도, 오래된 사진을 수동으로 정리하지 않아도 된다. 구글 포토는 인물, 장소, 시기별로 자동으로 기억을 분류하고, 쉽게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러한 자동화는 기억을 보관하고 다시 떠올리는 데 있어 큰 진보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 편리함에는 보이지 않는 그늘이 있다. 자동화된 기억은, 사용자에게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라는 선택권을 앗아간다. 오늘의 사진보다 5년 전의 사진이 먼저 떠오른다면, 오늘을 살아가는 감각은 뒤로 밀려날 수도 있다. 추억을 꺼내는 순서, 방식, 빈도가 인간이 아닌 시스템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다시 떠올리는 기억은 종종 사진으로만 구성된다. 한때는 냄새, 소리, 감정으로도 기억되던 순간들이 이제는 이미지 중심으로 재구성된다. ‘기억’은 점점 이미지화되고, 그 이미지들은 또다시 공유되고, 소비된다. 감정의 결이 사라지고, 남는 건 포즈와 배경뿐이다. 더 나아가, 기계가 꺼내주지 않는 기억은 점점 잊히기 쉽다. 카메라로 찍지 않은 장면은 빠르게 희미해진다. 사진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혹은 디지털 앨범에 저장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그 기억은 마치 없었던 것처럼 취급된다. 기억의 가치조차, 이제는 데이터의 유무에 달린 시대가 되어버린 셈이다.
2. 기억은 저장이 아니라 ‘느낌’이었다
기억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다. 그것은 특정한 감정, 맥락, 관계 속에서 다시 떠오를 때 비로소 의미를 가진다. 어린 시절 먹었던 음식의 맛을 떠올릴 때, 우리는 단순히 음식의 모양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 함께 있었던 가족, 주방의 냄새, 그리고 어떤 감정이 들었는지를 함께 떠올린다. 그것이 ‘추억’이다.
하지만 기계는 이런 감정의 층위를 해석하지 못한다. AI는 이미지를 분류하고 시간순으로 정렬할 수 있지만, 그날의 공기나 웃음소리, 설렘까지는 복원하지 못한다. 결국 기계가 꺼내주는 기억은 ‘감정 없는 프레임’일 수 있다. 우리가 기억 속으로 다시 들어갈 수 있는 것은, 그 감정을 다시 느낄 수 있을 때다. 그러나 매일같이 뜨는 ‘몇 년 전 오늘’ 알림은 그런 감정을 재현하기보다는, 일종의 자동화된 추억 소비에 가깝다. 그때의 감정이 아닌, 오늘의 스크린 안에서 재구성된 감정일 뿐이다.
기억은 저장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것이다. 그 순간의 의미는 시간이 지나며 바뀌고, 우리의 해석에 따라 더 깊어지기도 하고 흐려지기도 한다. 기계는 이런 유기적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기억을 기계에 맡긴다는 것은, 그 의미를 고정시키고 박제된 형태로 받아들이는 일일지도 모른다.
3. 기억의 주체로서 살아가기 위하여
추억을 꺼내는 일을 점점 기계에게 맡기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기억이 나를 만든다면, 나는 여전히 나의 기억을 스스로 관리하고 있는가?’
기억은 단순히 과거를 회상하는 일이 아니다. 기억은 정체성의 핵심이며, 현재의 나를 구성하는 토대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내가 어떤 기억을 가지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 그렇다면 그 기억을 기계가 대신 관리하고 호출한다는 것은, 정체성의 일부를 외주화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기억의 주체로 살아간다는 것은, 나의 감정과 해석, 나만의 문맥 속에서 기억을 간직하고 꺼내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사진첩을 정리하는 일이기도 하고, 누군가와 오래된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기도 하며, 때로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감정을 조심스레 되짚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는 기계가 보여주는 이미지가 아닌, 내 마음이 기억하는 장면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의식적인 노력을 필요로 한다.
사진을 찍지 않은 순간도 되새기자. SNS에 올리지 않은 하루도 의미 있다. 자동화된 알림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어떤 기억을 꺼내고 싶은지 묻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우리는 기계에 떠맡긴 기억이 아니라, 진짜 나의 추억을 가질 수 있다.
우리는 점점 더 많은 기억을 저장하지만, 그만큼 적게 느낀다. 사진은 넘쳐나지만, 그 사진을 둘러싼 감정은 희미하다. 매일같이 자동으로 재생되는 과거의 장면은 정작 나의 의지나 감정과는 무관하게 흘러간다. 기계는 기억을 보관하고 꺼내줄 수 있지만, 진짜 기억은 여전히 느끼는 자의 몫이다. 추억은 어떤 알림이나 타임라인으로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간직하고 싶은 감정에서 비롯된다.
추억을 꺼내는 일, 그것은 나만이 할 수 있는, 조용하지만 중요한 행위다. 기계가 그 일부를 도울 수는 있지만, 그 의미까지 대신할 수는 없다. 우리는 기억의 주체로서 살아갈 자격이 있고, 그 감각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기억은 기술이 아닌 마음의 힘으로 되살아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