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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기억 시대, 우리는 여전히 ‘경험하는 존재’일까

by winnie2725 2025. 4. 14.

디지털 기억 시대, 우리는 여전히 ‘경험하는 존재’일까?
데이터의 홍수 속에서, 감각의 인간으로 남기 위해 디지털 기억은 ‘경험’을 어떻게 바꾸는가.

 

디지털 기억 시대, 우리는 여전히 ‘경험하는 존재’일까
디지털 기억 시대, 우리는 여전히 ‘경험하는 존재’일까


과거의 기억은 흐릿하고 부정확했지만, 그래서 더 인간적이었다. 누군가와의 추억은 정확한 시간이나 장소보다는, 감정과 온도로 남았다. 어떤 날의 기억은 그날의 햇빛 색깔, 바람의 냄새, 함께 웃던 얼굴의 분위기로 떠올랐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사진, 영상, 위치 정보, 시간까지 정확하게 저장하고 있다. 기억이 더 이상 감각이 아닌 데이터가 되어버린 시대, 우리는 과연 ‘경험’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디지털 기술은 우리의 삶을 기록하는 데 있어 놀라운 능력을 발휘한다. 스마트폰 하나만으로 하루의 대부분이 저장된다. 걸은 거리, 찍은 사진, 나눈 대화, 방문한 장소까지 모두 자동으로 기록된다. 하지만 이처럼 자동화된 기록은 오히려 우리가 직접 감각하고 인식하는 순간을 줄여버리는 역설을 만들어낸다. 누군가와 여행을 가도 우리는 '경험'을 기록하기 위해 사진을 찍고 영상을 촬영하며, SNS에 올릴 문장을 먼저 고민한다. 순간의 몰입보다 미래의 공유를 위한 준비가 앞선다. 이럴 때 ‘지금 여기’는 경험의 장소가 아니라, 기록을 위한 무대가 된다.

디지털 기억은 정확하지만, 그 정확성이 감각의 온도를 빼앗는다. ‘그날의 하늘이 맑았다’는 문장은 사진보다 흐리지만, 더 넓고 풍부하다. 데이터는 객관적이지만, 감정은 주관의 세계에서만 진짜로 살아 숨 쉰다. 그래서 물어야 한다. 우리가 남기고 있는 것은 기억인가, 아니면 정보인가?

 

1. 디지털화된 삶 속에서 감각은 얼마나 살아 있는가


경험은 단순히 어떤 사건을 겪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감각을 통해 세계와 만나고, 감정을 통해 그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다. 즉, 경험은 오감의 총합이며, 내면의 반응이기도 하다. 그런데 디지털 기술은 이 감각적 경험을 점점 압축하고 표준화한다. 음식 사진은 ‘먹는 즐거움’을 시각 정보로 대체하고, 여행의 아름다움은 인스타그램 필터 속에 갇힌다.

우리는 어떤 경험을 했는지보다, 어떻게 기록되었는지를 더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다. “거기 정말 예뻤어”라는 말보다 “사진이 잘 나왔어”라는 말이 더 자주 쓰인다. 이는 감각보다 이미지, 즉 외부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보여주기’의 경험에 더 집중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럴 때, 진짜 감각은 점점 말라간다.

감각의 소외는 곧 존재의 소외로 이어진다. 철학자 메를로퐁티는 인간 존재의 핵심을 ‘몸’에서 찾았다. 그는 우리가 세계를 인식하고 경험하는 방식은 결국 몸을 통해서라고 말했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의 몸은 점점 수동적인 장치로 전락하고 있다. 눈은 사진을 찍기 위해 사물을 훑고, 손은 스크롤을 넘기기 위해 바쁘고, 귀는 이어폰을 통해 필터링된 소리만 듣는다. 몸은 세계와의 만남보다는 기계와의 상호작용에 더 익숙해져간다.

결국 우리는 물어야 한다. 감각 없는 삶은 삶일 수 있는가? 경험 없는 기록은 진짜 기억인가?

 

2. 우리는 여전히 ‘지금 여기’를 살고 있는가


‘지금 여기’라는 말은 철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인간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를 살아야 한다는 말은 단순한 조언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깊은 통찰이다. 그러나 디지털 세계에서 우리는 점점 더 ‘지금 여기’를 놓치고 있다. 우리는 현재의 경험보다 그것이 어떻게 저장되고 공유될지를 먼저 걱정한다.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도, 그 순간을 즐기기보다 ‘인스타그램에 올릴 사진’을 찍는 데 몰두한다. 여행지의 풍경을 눈으로 바라보며 감탄하는 대신, 영상 속 앵글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점검한다. 이때 경험은 실시간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 다시 보기 위해 저장되는 ‘미래의 소비재’로 변한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을 ‘현존재’라 표현하며, 세계 안에 던져진 존재라고 말했다. 우리가 세계와 직접 만나는 그 순간, 우리는 존재한다. 그러나 ‘지금 여기’를 놓친 삶은 결국 진짜 삶이 아니다. 우리는 존재하지만, 실제로 ‘사는 것’은 아니다. 기록을 위한 삶, 보여주기 위한 경험은 존재의 실질을 비워낸다. 지금의 우리는 얼마나 ‘현재’에 머무르고 있는가? 우리가 경험한다고 말하는 것들이, 과연 경험이라 부를 수 있을 만큼의 깊이와 감각을 가지고 있는가?

 

3. 디지털 기억 속에서 인간다움을 회복하려면


디지털 기억은 인간의 기억력을 보완하고 확장하는 데 있어 엄청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다움의 핵심을 대체할 수는 없다. 인간다움은 단지 기억의 양이나 정보의 정확성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경험의 질’에 있다. 그리고 그 경험은 몸과 감각, 감정, 그리고 시간이라는 요소를 모두 포함할 때 비로소 살아 있는 것이 된다.

우리가 디지털 기기에 의존할수록, 의식적으로라도 감각을 되살리는 훈련이 필요하다. 기록보다 감상을, 저장보다 몰입을 선택해야 한다. 어떤 장면을 꼭 사진으로 남기지 않아도 좋다. 대신 그 순간의 냄새, 온도, 기분을 마음속에 천천히 담아보자. 그렇게 기억한 장면은 아무리 흐려져도 나만의 경험으로 남는다.

또한 우리는 ‘삭제할 수 없는 기억’도 되살펴야 한다. 디지털 기록은 원하면 지워진다. 그러나 인간의 기억은 망각과 용서, 후회와 성장이라는 과정을 거쳐 더욱 깊어진다. 인간적인 기억은 오류투성이지만, 그렇기에 더욱 의미 있고 풍부하다. 우리가 인간다움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기억을 다시 ‘살아 있는 경험’으로 되돌려야 한다.

디지털 시대에도 우리는 여전히 ‘경험하는 존재’가 될 수 있다. 단지 그 길이 조금 더 의식적이고, 느려야 할 뿐이다. 감각을 회복하고, 현재에 몰입하고, 기계가 줄 수 없는 감정의 밀도를 다시 껴안는 삶. 그것이 기술 속에서도 인간으로 남는 길이다.

우리는 디지털 기술이 주는 편리함을 완전히 거부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기술과의 ‘균형’이다. 모든 경험을 디지털로 전환하지 않더라도, 때로는 의도적으로 기록을 멈추고 감각에 집중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아날로그적인 시간은 느리지만, 그만큼 깊고 섬세하다. 매일 몇 분이라도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오롯이 ‘지금 이 순간’에 몰입하는 시간을 만들어야 한다. 눈앞의 풍경을 사진으로 남기기보다, 마음에 담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는 단순한 낭만이 아니라, 우리가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한 근본적인 실천이다. 디지털 기억의 시대일수록, 감각의 민감성과 삶의 밀도는 의식적으로 길러야 하는 덕목이 된다. 경험은 데이터를 넘어 존재의 흔적이며, 우리는 여전히 그 흔적을 남기고 살아가는 존재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